패티 김 Patti Kim - 한국형 여성 팝 보컬의 시작

패티 김 Patti Kim - 한국형 여성 팝 보컬의 시작

본명
김혜자 (金惠子)
출생
1938년 2월 28일 (86세)
경기도 경성부 인사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본관
전주 김씨
최종 국적
대한민국
배우자
길옥윤(1966 ~ 1973)
아르만도 게디니(1976 ~ )
자녀
장녀 정아 게디니 윌리엄스(1968년 11월 13일생)
차녀 카밀라 게디니(1978년 12월 30일생)
학력
중앙여자고등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침례회)
신체
168cm, B형
데뷔
1958년 미 8군 무대
활동 시기
1958년 ~ 2013년
소속사
PK 프로덕션


한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영원한 라이벌인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와 함께 여성 가수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선 대가수이자 자타공인 전설적인 디바이다. 한국형 팝보컬의 선구자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숱한 '최초'의 타이틀을 기록한 인물이다. 뛰어난 무대매너와 트렌디한 스타일링, 팝을 기반한 보이스 색깔과 넓은 음역대를 구사하는 드라마틱한 가창력으로 가장 격조 높은 보컬리스트로 꼽힌다.

1956년에 국무총리배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여 데뷔하였고, 2년 후 1958년 미 제8군 무대에서 가수 이해연과 듀엣으로 가수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예명은 '린다 김' 이었는데 1959년 1월 초에 미국의 여가수 패티 페이지와 같은 명가수가 되고 싶다는 뜻에서 현재의 예명으로 바꾸었다. 패티김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스타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가는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해방 후 1960년, 일본시장에 처음 진출한 것을 비롯해 한국가수 2번째 미국시장 진출, 한국 여가수 최초 미국 카네기 홀 공연, 한국 가수 최초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공연 등 사실상 현재 한국 가수들이 이뤄 낸 해외 커리어를 모두 시도한 가수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물론 시도에 의의가 있고, 본인도 자서전에서 밝혔듯 크게 고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동양여성으로서 홀로 미국시장에 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2013년, 긴 가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녀는 여러 곡의 히트곡을 냈고 누가 뭐래도 한 시대를 지배했던 대형 여성 가수였다.〈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서울의 찬가〉,〈그대 없이는 못 살아〉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2022년 11월 26일, 12월 3일, 12월 10일 3부에 걸친 불후의 명곡 패티김 편을 통해 거의 만 10년 만에 방송에 출연했다.

그리고 2023년 11월 18일에 불후의 명곡 in 뉴욕 방송에 재출연했다.

2024년 2월, IU의 미니 6집 'The Winning'의 수록곡 'Shh..'에 스페셜 내레이션으로 참여했다.

가수 이미자하고는 라이벌 관계로서 함께 묶여 언급된다. 데뷔시기도 같은데다가 나이대도 비슷하고, 음악스타일 역시 이미자가 트로트의 여왕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강한 노래를 주로 불러왔다면 패티김은 스탠다드 팝 위주의 세련되고 서구적인 정서가 다분한 노래를 주로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교되었다. 또한 대중성 측면에서도 이미자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의 가수였다면 패티김은 세련되고 도시적인 분위기로 완전히 상반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언론이나 대중이나 둘을 항상 라이벌 관계로 묶어 자주 비교했다.

실제로도 서로 신경전이 치열했던 걸로 유명했다. 작곡가 임석호가 방송에서 밝히기를 패티김을 영입하고 싶어했던 이미자의 소속 음반사 회장이 "우리와 계약하면 이미자와 같은 급으로 대우 해주겠다"고 직접 스카웃 제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패티김 측에서 "최고의 대우도 아니고 이미자와 동급 대우가 말이 되냐" 라며 단칼에 거절하는 바람에 계약이 불발되었다. 그 외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로 방송국 측에서 패티김과 이미자를 동시에 섭외하려고 했었는데, 어느 한 쪽의 출연 순서가 뒤로 밀리면 캐스팅을 거부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1순위로 써진 큐시트를 두 가수에게 보냄으로서 겨우 캐스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먼저 도착한 가수가 리허설을 빨리 끝내고 무대에 먼저 올라가자 '나 일 있어서 무대 안 올라간다' 며 그냥 노래를 안 부르고 가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나이가 든 뒤엔 함께 토크쇼에도 나오고 덕담도 해주는 등 디바기질이 많이 가라 앉기는 했다. 2010년에는 고인이 된 박춘석 작곡가의 추모 특집으로 방영된 방송에 같이 나온 적이 있는데 "나는 대중가수지만 이미자는 국민가수다. 나랑 비교하기 힘들다." 라고 세간의 불화를 일축시킨 바 있다. 또 패티김 본인의 은퇴 당시 인터뷰에서는 "우리는 같은 가요계를 걸어온 동반자일 뿐, 라이벌로 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라며 일축한 바 있다.

원래 길옥윤과 1966년에 결혼했으나 1973년에 이혼했고, 1976년 이탈리아 사람인 아르만도 게디니(Armando Ghedini, 1938년 9월 10일~)와 재혼했다. 아르만도 게디니와는 백년해로 중이다.

길옥윤과는 진짜로 성격 차이로 이혼했는데, 술이나 담배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고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똑같은 시간에 자고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을 정도로 칼같은 패티김의 성격과는 달리 길옥윤은 술을 마음대로 마시고 그래서 자주 만취된 상태를 보여줬던 데다가 도박을 즐기고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이었던지라 금슬이 좋기 힘들었다.


슬하에 2녀가 있지만 큰딸 최정아(1968년 11월 13일~)는 전남편 길옥윤의 딸이고 둘째딸 카밀라 게디니(Camila Ghedini, 1978년 12월 30일~)는 패티김이 이탈리아인인 현재의 남편인 아르만도 게디니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패티김 이탈리아'라는 자동 검색어까지 있다.

그런데 장녀 최정아도 영국 백인 사위 윌리엄스와 결혼하는 바람에, 패티김의 후손은 장녀 최정아를 제외하고 전원 백인 혼혈이 되었다. 다만 장녀 최정아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모두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이 부모양계주의 국적법으로 전환되어서 1998년 6월 14일생부터 부모 중 한명이 한국인이면 출생국가와 상관없이 한국 국적이 부여된다.

차녀 카밀라 게디니는 이탈리아 혼혈로 빼어난 미인에 키까지 커서(171cm) 모델을 연상하게 하는 외모를 지녔다. 2003년에 가수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당시 가수 패티김의 딸이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으며, 데뷔하기 전에 팬클럽이 형성되는 등 반응이 좋았다. 데뷔앨범 역시 당시 유명했던 유정연, 업타운의 정연준, 러브홀릭의 강현민 등 유명 프로듀서진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정서와 맞지 않는 한국 연예계의 시스템과 문화를 많이 어려워 했고, 자신의 음악 지향점과 맞지 않는 장르를 강요받는 등 한국에서의 음악 활동을 많이 힘들어했다. 결국 1집을 이후로 가수활동을 접어 버린다.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웨딩플래너로 전직한 후 정착해서 살고 있다.


최정아와 카밀라는 아버지가 다른 이부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친자매 이상으로 좋은 우애를 과시하고 있으며, 최정아는 새아버지 아르만도에게 새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어린 효도를 다하고 있다.

1958년 Padre
1958년 Summer Time
1958년 사랑의 맹세(Till)
1962년 초우
1966년 4월이 가면
1966년 사랑의 세레나데
1967년 그대 없이는 못 살아
1967년 무정한 밤배
1967년 살짜기 옵서예
1967년 빛과 그림자
1967년 연인의 길
1967년 하와이 연정
1968년 9월의 노래
1969년 사랑하는 마리아
1969년 서울의 찬가
1970년 태양이 뜨거울 때
1970년 1990년
1970년 사랑하는 당신이
1970년 사랑이란 두 글자
1971년 능금꽃 피는 고향
1971년 장미와 빤따롱
1972년 바람따라 별따라
1972년 서울의 모정
1972년 이별
1972년 사랑이여 다시한번
1974년 다시 한 번 안녕
1974년 사랑은 영원히
1975년 나는 가야지
1978년 초겨울
1978년 못 잊어
1978년 추억속에 혼자 걸었네
1978년 친구여 안녕
1978년 멀리 있어도
1982년 가을의 연인
1982년 당신이면 좋아요
1982년 행복한 여자
1983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1983년 사랑이여 그날까지
1984년 사랑은 생명의 꽃
1984년 가시나무새
1984년 밤에 쓰는 편지
1987년 사랑은
1987년 슬픈 사모
1990년 누가
1990년 사랑은 멀어지고 이별은 가까이
1990년 인생은 작은 배
1995년 인형의 눈물 - 길옥윤 사후에 발표된 곡이며, 길옥윤의 유작이다.
1998년 우리사랑 - 조영남과 함께 듀엣으로 함께 부른 곡이다.
1999년 인연
2008년 그대 내 친구여
2008년 나의 노래 - 김희갑&양인자 부부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진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