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南珍|Nam Jin - 1960~70년대의 슈퍼스타
본명
김남진 (金南鎭, Kim Nam Jin)
출생
1945년 9월 27일 (79세)
전라남도 목포부 창평동 7-3번지
(現 전라남도 목포시 창평동)
거주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국적
대한민국
본관
김해 김씨 (金海 金氏)
신체
172cm
가족
아버지 김문옥, 어머니 장기순
형 김상진, 김응진, 남동생 김익진
딸 3명, 아들
학력
목포북교초등학교 (졸업)
목포중학교 (졸업)
목포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중퇴)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연극영화학 / 학사)
종교
개신교(예장합동)
병역
대한민국 해병대 제2여단 병장 만기전역 (병 204기)
참전
베트남 전쟁
데뷔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
대한민국의 가수로, 오빠부대의 원조격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서 라이벌인 나훈아와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연예계의 대선배이다.
1965년 데뷔해 2024년 기준 데뷔 59년차이며, 70대 후반인 현재도 현역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의 산증인이자 레전드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스탠다드 팝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 창법을 선호했고, 선이 굵은 저음의 남자다운 보이스를 가지고 있다.
1990년대 두번째 컴백 이후로는 나이 등의 이유로 트로트 곡 위주로만 발표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최전성기에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고 가며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를 깊게 의식하여 엘비스를 벤치마킹한 것도 유명하다. 그가 부르는 트로트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에게서 나오는 뽕끼가 덜해서 지금 들어도 중후하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현재는 가수로서만 기억되지만, 원래는 영화배우를 지망한 연극영화과 출신 미남이었고, 실제로 전성기에는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늦둥이 겸 차남으로 태어난 남진은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음악에 심취했다.
남진의 집안은 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집에 자가용이 있었을 정도로 목포에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는데, 학생 때부터 닐 세다카나 폴 앵카 등의 팝송을 즐겨 불렀던 남진은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게 된다. 비록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당시 남진은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한 상태였다.
앞서 레스토랑의 밴드 마스터로부터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해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받고, 그로부터 자신의 음악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생 생활을 할 것을 제의받는다. 영화배우의 길을 꿈꾸어 왔지만, 당시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예뻐서 등록하고, 연습생 겸 연애 생활을 시작한다. 불과 몇개월 후인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하게 된다. 데뷔곡은 한동훈이 작곡한 '서울 푸레이보이'라는 스탠다드 팝을 연상시키는 곡이었지만, 철저하게 폭망하고 실망한 그는 낙향했다.
다시 작곡가 한동훈이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속가수 제안을 하고, 두 번째 음반을 발표했으며, 첫 번째 음반과 달리 방송에도 제법 타는 등 히트 바로 직전까지 갔지만, 당시 노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에 의해 금지곡 처분이 되었다. 금지곡이 된 타이틀 곡명은 '연애 0번지'.
두 번째 음반도 실패를 하자, 다시 고향 목포로 낙향하여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앨범의 수록된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 것을 권유했다. 이 곡은 2집 레코딩 중 작곡가인 김영광이 남진에게 부르게 했으나, 남진이 트로트를 부르기 창피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는데, 이에 김영광이 그래도 노래가 아까우니 내가 불러서 곁다리로 음반 맨 끝에 넣겠다고 하였으나,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오지 못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곡 수는 채워야 해서 내키지는 않지만 녹음을 한 후, 앨범 맨 끝에 집어 넣었는데, 이곡이 그야말로 대히트를 치면서 남진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트로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듬해인 1966년 정두수 작사 박춘석이 작곡한 '가슴아프게'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그 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하였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대활약하게 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발매된 로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고와야지'는 그를 단순히 트로트 가수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받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의 소녀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 후 '그대여 변치 마오', '님과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다.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인 1968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후 베트남전에도 파병되었다. 남진이 무릎팍도사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원래 1년 동안 파병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귀국한 후 베트남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대한남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여단장에게 부탁해서 2년간 파병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수많은 동료들의 전사를 겪으면서 사람은 죽으면 다 똑같다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월남전에 파병된 남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파병초기에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나중에는 군복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남진의 인터뷰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남진이 월남전에 파병된 실제 이유는, 해병대 입대 후 군무를 완전히 이탈하여 자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집에서 지내며, 연예활동을 계속 하는 등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군복무위반 비리를 저지르다가 군 수사당국에게 들통나 그로 인한 징계로 베트남에 강제로 보내진 것이었다고 당시에는 보도되었다. 남진 외에도 진송남, 박일남 등 당시 해병대 소속이던 10여 명의 연예인들이 해병대 간부들의 비호 아래 모두 그러한 혜택을 보았던 조직적인 비리였다. 당시 그 사건을 보도한 뉴스 기사 링크들. 기사1, 기사2 44년뒤에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저 사건에서 해병대 복무 중에도 집에서 지내고, 왔다갔다 하며 자유롭게 연예활동을 한 것은 남진 등 해당 연예인들이 군율을 어기는 잘못이 아니라 해병대 측의 약속과 비호에 따른 행위였을 뿐이었다. 애초에 해병대가 군복무 중에도 연예계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하고, 그 조건으로 스타들의 "해병대 연예대" 입단을 추진하여 해병대 연예부대의 구성원을 유명스타들로 빵빵하게 채운 것이었다. 즉, 유명 연예인들을 육해공이 아닌 해병대로 데리고 오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과 대우를 걸고 스카웃한 것이었다.
근데 모 신문사 회장이 자기 딸의 생일파티에 당시 해병대 일병이던 남진을 포함한 연예병사 5명을 초청했지만, 군인 신분에 사적인 초대이기에 거절했고, 이에 신문기사를 통해 군복무 중에도 사회에서 연예계 활동을 계속 해왔던 것을 폭로하는 보복성 기사를 보도한 것이었다고 박일남이 티비쇼에서 밝혔다. 해병대 측이 당초 약속하여 보장한 바에 따른 연예인 활동이었을 뿐이었다는 원인 내용은 쑥 빼버리고 자유로운 사적생활과 연예계 활동을 했다는 결과만 폭로한 보도가 나가서 남진 등의 연예인과 해병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해병대 고위간부들이 국내 연예활동을 보장했던 당초의 약속을 뒤집고 베트남으로 파병시켜버린 것이었다.
최고의 순간에 군대행을 택하고, 해병대의 모습으로 월남전까지 다녀 온 그는 묘하게도 그가 벤치마킹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행보와도 매우 닮아 있다. 엘비스는 1950년대 후반 로큰롤 음악이 기성 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몰락 위기에 빠지자,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이미지 쇄신을 노린 바 있었는데, 이후 G.I. Blues라는 곡과 동명의 영화를 발표하면서 "성실한 미국인 젊은이"의 이미지로 거듭났다. 남진 역시 엘비스의 G.I. Blues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불렀고, 1973년 하와이 공연 때 엘비스가 입었던 점프수트를 매니저가 직접 미국까지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를 직접 만나 구해온 것도 유명하다.
1971년, 군에서 제대하고 국내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 박춘석이 라이벌 나훈아와 손을 잡고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는 중이라 이쪽과의 협력은 접고 다른 파트너(남국인)를 찾아 곡을 받고 다시 정상의 반열에 서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남진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님과 함께"였다. 제대 후에 더욱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 그는 국내 가수 최초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귀국 기념 공연을 열었고, 컴백 4개월만에 TBC 남자가수상과 MBC 최고 가수상에 오른다.
언론은 그의 컴백과 더불어 당시 촉망받는 신인인 나훈아와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초기 3년간은 남진이 내리 3연속 가수상을 타며 나훈아를 완전히 압도했다.
이후 1972년 '나훈아 피습사건'이라는 큰 사건이 터졌다. 이때 나훈아 피습사건의 범인으로 낙인이 찍혔고, 루머가 당시엔 급속도로 퍼졌다. 피습 당시보도 당시 기사
이후 라디오 스타 622회에서 밝혔지만, 이어 남진은 "몇십 년 지나서 안 사실이다. 신성일 선배한테 그 괴한이 제일 먼저 갔더라. 그 다음으로 저한테 왔다. 아침에 인기척에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면서 괴한이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남진은 이를 거부했다면서 "(괴한이) 당신 라이벌을 해치면 돈을 줄 거냐고 말을 하더라. 정상이 아니구나 싶었다"고 덧붙여 좌중을 경악케 했다.
이어 남진은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사고가 난 거다. 나중에 저희 목포 집에 와서 방화도 하고 그랬다. 어머니가 계신 집이었다. 지금도 마음이 아픈 게,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초상화가 탄 게 지금도 성질이 난다"고 고백해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안겼다.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하여 화제를 끌었지만, 1979년 이혼을 하고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으로 조직적으로 탄압받으며, 미국으로 가게 된다. 조용필 등 후진들이 치고 올라온 탓도 있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는 한참 나중 일이고, 김대중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시킨 탓이 훨씬 크다. 김대중의 학창시절에 남진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포일보에서 사장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남진 아버지 덕을 많이 봤다고 한다. 목포에 내려가면 항상 남진의 부친의 집에 묵었다고... 1990년대에 국내로 다시 복귀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에겐 가수로만 알려져서인지 오랜만에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집창촌 부근 성당의 욕쟁이 주임신부 역할로 출연하자 "남진이 영화에도 나온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이미 전성기이던 1970년대에 히트곡의 이름을 딴 님과 함께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가수 겸 배우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 잘 생긴 얼굴과 큰 인기 덕에 영화에도 나온 거고 배우로서는 연기가 좋다고 할 수 없어 별다른 성과가 없긴 하였지만. 나훈아도 인기빨(..)로 연기를 몇 번 한 적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에 조폭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리는 큰 부상을 입었으며, 지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허벅지에는 큰 동맥이 지나가는 곳이라, 조금만 옆으로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21세기에도 방송에서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 낸 "둥지"가 대표적. "신비주의" 컨셉의 나훈아와 대비된다. 2008년 이후 나훈아가 모종의 사건 이후 활동을 중단하면서 최근 더욱 두드러진다. 2009년에는 장윤정과 함께 남녀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듀엣 가요 "당신이 좋아"를 발표하면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본업인 가수로서 각 지방 공연은 2018년 현재에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으며, 곧잘 매진이 되고 있다.
2023년 1월 28일 배구선수 김연경,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악성 댓글들이 달리자, 김연경 선수와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 만난 것이며 김기현 의원과는 모르는 사이라고 해명했다. 사실 남진은 워낙에 지역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인맥이 폭넓은 연예계 대표 마당발인 만큼, 다양한 정치인 혹은 정치인 지망생들과도 친분이 있고 그만큼 지원유세나 사진 촬영 요청을 많이 받는다. 그가 지원유세를 다닌 인물들을 쭉 보면 안민석, 성일종, 박주선 등 당을 전혀 가리지 않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65년 1집 《서울 플레이보이/ 연애 0번지》
1967년 2집 《가슴 아프게/ 울려고 내가 왔나》
1971년 3집 《마음이 약해서/ 지금은 헤어져도》
1972년 4집 《아랫마을 이쁜이/ 목화 아가씨/님과 함께》
1973년 5집 《그대여 변치마오/ 그 소녀 이슬비》
1976년 6집 《떠나면 되지/ 어머님》
1976년 7집 《어머님 사랑/ 너와는 바꿀 수 없어/ 우수》
1976년 8집 《너의 고운 마음씨/ 오늘은 기분이 좋은 가봐》
1977년 9집 《형/ 기다려야지》
1979년 10집 《사나이기에/ 만나야해》
1982년 11집 《빈잔/ 정 때문에》
1984년 12집 《사나이라면/ 화끈해야죠》
1987년 13집 《내가 나를/ 가시려나 그대여》
1992년 14집 《바다/ 사랑은 어디에》
2000년 15집 《둥지/ 고개숙인 남자》
2002년 16집 《모르리/ 옛사랑》
2005년 17집 《저리가/ 사랑의 퍼레이드》
2008년 18집 《나야 나/ 바람의 여인》
2009년 19집 《님 오신 목포항/ 내 마음 모르리라》
2012년 20집 《뽀뽀/ 이력서》
1966년 울려고 내가 왔나
1967년 가슴 아프게
1967년 너와 나
1967년 마음이 고와야지
1967년 우수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
1972년 님과 함께
1972년 목화 아가씨
1972년 젊은 초원
1973년 그대여 변치 마오
1974년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1975년 김포가도
1982년 빈 잔
1993년 내 영혼의 히로인
1999년 둥지
2002년 모르리
2008년 나야 나
2009년 당신이 좋아(with 장윤정)
2012년 이력서
2014년 상사화
2014년 파트너
2016년 사치기 사치기(with 윤수현)
2016년 너는 나만믿고 따라와
2018년 남자다잉
2020년 오빠 아직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