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춘화 | 河春花 | Ha Choon-hwa - 슈퍼스타가 된 트로트 영재
출생
1955년 6월 28일 (69세)
전라남도 영암군
국적
대한민국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래미안 리더스원
본관
진주 하씨
신체
162cm, 50kg, 235mm, A형
데뷔
1961년 노래 '효녀 심청 되오리다'
학력
서울수송초등학교 (졸업)
정화여자중학교 (졸업)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경남대학교 병설 산업전문대학 (가정학 / 전문학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 96 / 학사)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예술학 /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철학 / 박사)
가족
부모님, 4자매 중 둘째, 배우자 (1995년 결혼)
종교
천주교 (세례명: 세실리아)
1962년 2월, 만 6세로 당대의 가수들도 발표하기 어려웠던 10인치 LP 스튜디오 앨범인 당년 7세 소녀가수 앨범으로 데뷔해 2024-11-26 11:27:03+0900 현재 데뷔 63주년을 맞이한 전설적인 대가수.
데뷔 60주년에도 만 66세밖에 되지 않았다.
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하춘화의 아버지 하종오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켰다. 개요에서 소개되었듯 1962년 7세로 데뷔하고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춘화의 전성기를 짧게 말하자면, 1970년대를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남진, 나훈아, 송창식 등 수많은 명가수들이 활동하던 시절임에도 1970년대 내내 정상의 인기를 누렸고, 20대의 나이로 인기 가수 이상의 국민 가수로서 범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가수이다.
60년대에도 이미 히트곡을 배출한 상태에서 1971년 발표한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고, 고봉산과 듀엣으로 부른 '잘했군 잘했어'도 히트하여 1972년 TBC 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영암아리랑, 난생 처음, 대관령 아리랑 등이 연이어 히트치면서 자그마치 4번이나 대상을 수상하며 가수로서의 굉장한 사랑을 받았다.
그 사이 잠깐잠깐 많은 인기를 끌거나 대단한 인기를 누리며 저물어간 가수들은 많아도, 1970년대 내내 하춘화는 독보적인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1974년 TBC와 MBC의 가수왕 자리를 동시에 차지하며 그 해의 전관왕을 차지했다.
이 대단한 인기를 견인했던 것이 바로 리사이틀. 하춘화는 앨범도 무척 많이 냈지만 그 시절 대중들에게 하춘화 리사이틀의 표나 포스터가 친숙할 정도로 굉장히 많은 공연을 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났을 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에게 하춘화의 소재파악에 관한 보고가 시시각각 들어갔을 정도이고, 당시 국민들의 관심사도 '하춘화가 살았느냐 죽었느냐' 였으니 가히 많은 영향을 끼치는 연예인이었고, 80년대 코미디의 황제가 된 이주일도 이 사건 이후로 하춘화의 공연 전속 사회자를 하다가 인기가 높아졌다.
이렇듯 국민들에게 친숙함을 줄 정도의 인기를 누리던 하춘화는 1979년 결혼 준비와 학업으로 인하여 은퇴했다. 이후로는 1977년부터 꾸준히 성장해 정상의 자리에 오른 혜은이, 이은하가 가요계의 양대 여가수로 자리 잡았다.
1981년 가수로 다시 복귀하여 활동했고, 2년간의 공백에도 1982년 가요톱10에서 1위 곡을 배출했다. 1985년 남북 예술인 교환 공연 당시 남한에서 하춘화를 북한에 보내는 예술단의 일원으로 공연을 보냈을만큼 여러모로 한국을 대표했던 가수이다.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1991년에 총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였고 최다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다. 이후 하춘화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연하의 남자'를 부르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로서 하춘화는 춤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으나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나이야 가라' 등 신곡을 꾸준히 발표했다. 학업은 계속해서 병행하고 있는 모양이며 2019년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2018년 발표)라는 노래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하춘화는 성격이 굉장히 대인배였는데, 보통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성공하면 안하무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하춘화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다. 훗날 이주일은 이런 하춘화를 대단히 고마워하며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하춘화 덕분에 우리집을 샀다"고 말하며 하춘화를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며 존경했다.
그 뒤 1977년 이리시(현 익산시)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인근에서의 대규모 폭발사고로 인해 극장이 무너져내려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을 입었다. 이 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업 및 결혼 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했다.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다.
하춘화는 평생동안 기부해왔다. 2011년 기자의 질문에 '200억 정도 될까요?'라고 어림 잡아 이야기했는데 더 될 수도 있다고 한다. 2021년 KBS2 연중 라이브에서 연예계 최고의 기부 스타 1위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기부하는 이유에 대해 "한 번도 (연예인으로서 수입을) 내 돈으로 생각한 적 없다. 이 돈은 나누기 위해 쓰라고 생긴 돈"이라며 “앞으로도 노래와 함께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밝혔다.
이 와중에도 하춘화는 공연과 학업을 병행함에도 불구하고 학업에도 열중하여 1994년에 고려대학교 자연자원대학원 최고정책과정을 수료한 후 1996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관리학과에 입학하여 1998년 졸업하였다. 2000년 8월에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공연예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2006년 8월에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예술철학 전공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에 박사학위를 소지한 최초의 대한민국 가수가 되었다.
다만 학위 경력상 제대로 된 일관성이 없다는 점은 비판받는다. 특히 동국대 석사 당시에는 대놓고 학교에서 학위 장사한다며 법대 학생들이 들고일어났었는데, 이 때문에 법학사 학위는 무산되고 대신 예대로 다시 들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