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총인민회의 서기장리비아 혁명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معمر القذافي | Muammar Gaddafi

초대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총인민회의 서기장리비아 혁명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معمر القذافي | Muammar Gaddafi

 

 

이름
무아마르 무함마드 아부민야르 알카다피
مُعمّر محمد أبو منيار القذّافي
Muammar Muhammad Abu Minyar al-Gaddafi
출생
1942년 6월 7일
이탈리아령 리비아 시르테[A]
사망
2011년 10월 20일 (향년 69세)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시르테[A] 인근
재임기간
리비아 혁명지도자
1979년 3월 2일 ~ 2011년 10월 20일
리비아 혁명평의회 의장
1969년 9월 1일 ~ 1977년 3월 2일
리비아 총리
1970년 1월 16일 ~ 1972년 7월 16일
리비아 총인민회의 서기장
1977년 3월 2일 ~ 1979년 3월 2일
아프리카 연합 의장
2009년 2월 2일 ~ 2010년 1월 31일
리비아 총인민회의 서기장 (권한대행)
2011년 8월 24일 ~ 2011년 10월 20일

 



거리에 시위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리비아의 온 국민이 나를 사랑하니까 말이다.
리비아의 군인 출신 독재자.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2011년 축출될 때까지 무려 42년간 리비아를 철권 통치했다. 상당한 기간 동안 권력자로 있으면서 다양한 행적을 보였으며, 현재도 아프리카의 독재자라고 하면 이디 아민, 로버트 무가베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고 대외적으로도 많이 알려져있다.

생전에는 반미와 아랍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말년의 막장행보와는 별개로 석유국유화 행보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는 중동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가 별로 없었고, 또한 쿠데타 이전 기존 왕실은 서방과 결탁하였었기에 부의 분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었으며, 미국은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에 서방국가들이 산유국들에게 한 짓거리라고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현지 고위 권력층과 결탁해 자원을 값싸게 후려치는 짓 따위였으니 그에 대한 반발도 심했고, 당시 아랍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서 카다피의 리비아는 독보적으로 국민소득 수준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석유국유화 덕으로 크게 향상되었으니 그와 함께 카다피가 높게 평가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높게 평가받았냐면 그것 역시 결코 아니었고 실상 아랍권에서도 호불호가 격렬히 갈렸던 인물이었다.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복무 중 27살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의 국가원수, 국가평의회 의장(국회의장), 총리, 국방장관 등 입법부와 행정부의 요직을 모조리 독점하며 국가 운영에 필요한 모든 권력을 혼자서 행사했다. 이후 1977년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주창함과 동시에 다시 헌법과 의회를 폐지하고 자칭 자마히리야 체제를 선포하여 전제적 독재권력을 행사했다.

과거 중동 일대에서 강경 반미 성향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 과정에서 테러 등도 서슴없이 강행하다보니 서구권으로부터 '사막의 미친개', '아랍의 망나니'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렸으나 2000년대 이후로는 미국과 관계 회복을 어느 정도 이루어내서 많이 사그라들었다. 2009년 UN 연설 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아프리카의 왕중왕으로 자칭했다. 리비아 내의 타민족 간의 통합 및 한국 건설회사를 통한 리비아 대수로 건설 등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부족주의 전통이 강한 북아프리카-중동의 다른 독재자들이 으레 그랬듯 해당 과정에서도 자기네 부족을 더 우대하고 친지들을 요직에 배치하며 세습제 국가를 만들려는 시도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2011년,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으로 반대세력의 저항에 직면했다.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한 전면전이자 살육전으로 맞대응했으나 이로 인해 카다피 정부군과 시민군 간 내전이 촉발되었고 같은 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의 무력 개입인 오디세이 새벽 작전으로 인해 2011년 8월 정권이 무너지면서 리비아 정국을 장악한 반카다피 시민군 세력들을 피해 이곳저곳을 피해다니는 처량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2011년 10월 20일 그의 고향이자 마지막 거점인 시르테(Sirte)에서 나토군의 공습에 이은 시민군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였다.

한국 입장에서는 1970년대 한국 기업들이 석유붐을 타고 중동에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 카다피 정권의 리비아도 한국기업들에게 '대수로 공사' 등을 발주했고, 그 때문에 한국기업이 70년대에 이미 리비아에 진출했다. 덕분에 중동 건설 붐이 일때 한국 언론에도 종종 등장하여 그때부터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있었다.

아랍어를 라틴 문자로 옮겨쓰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아랍어권 국가·지역마다 발음이 똑같은 게 아니라서 그의 이름을 'Gaddafi', 'Kaddafi', 'Qadhafi' 등으로 통일되지 않게 표기하고 있다. 위 그림에서와 같이 무려 34,560가지의 서로 다른 표기가 가능하다.

먼저 카다피의 이름인 مُعَمَّرْ اَلْقَذَّافِيّ(Muʿammar al-Qaḏḏāfī)의 현대 표준 아랍어 발음은 [muˈʕamːar alqaˈðːaːfi](무암마르 알카다피)이다. 다만 이름인 Muʿammar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같은 자음이 겹칠 때 겹쳐 적지 않는 경향 때문에 관용적으로 무아마르라고 표기한다. 성인 Qaḏḏāfī의 경우 리비아 아랍어에서는 [ɡəˈðːaːfiː](동부) 혹은 [ɡəˈdːaːfiː](서부)처럼 q를 /ɡ/로 발음하기 때문에 '가다피'란 표기 역시 근거가 없는 표기는 아니다.

실제 사용례를 보면, 트리폴리 남부 바브알아지지야(باب العزيزية)에서 발견된 카다피의 여권과 녹색서에서는 'M. Al Gathafi'로 적혀 있었으며, 한국의 경우 2003년 12월 55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국립국어원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 Qaddafi)'로 규정했다. 해외에서는 Gaddafi로 명칭이 암묵적으로 통일된 듯 하다.

영문 표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하면 원래 언론의 경우 뉴스통신사가 있어 모든 분야를 커버하고, 신문사나 잡지, 방송사 등에서 통신사와 계약하고 그 기사들을 쓴다. 그런만큼 통신사들의 글 스타일은 다른 언론사들의 기준이 되는데, 통신사들 중에서도 카다피의 스펠링은 거의 다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의 AP는 Gadhafi, 영국의 Reuters는 Gaddafi, 프랑스의 AFP는 Kadhafi로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보통 AP가 가장 넓은 분야를 커버하고 대중적인 미국 영어를 쓰기에 많은 영어권 언론사들이 AP스타일을 따른다. 이 경우 영어권 언론에서 스펠링이 가장 간단한 Gaddafi가 대중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27세라는 어린 나이로 집권하여 42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리비아라는 후진국을 중견국으로 성장시킨 유능한 지도자라는 평가와, 강압적 통치로 국민들을 탄압하고 기행과 부정부패로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독재자라는 평가가 공존하며, 리비아 내에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봐도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전 세계 독재자들 중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라고 하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새뮤얼 케니언 도와 함께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쿠데타를 통해 27세에 국가 최고지도자에 오른 카다피는 석유 기업들을 국영화한 뒤 오일머니를 이용해 국민들을 위한 복지 제도를 도입했다. 리비아 곳곳에 도로, 학교, 병원 등을 지었고, 노동자의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국민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교육 사업에 주력해 리비아 국민 문맹률을 90%에서 10%대로 낮추었다. 당시 400만 명이 조금 넘는 리비아 총 인구 가운데 140만 명이나 무상으로 대학 교육까지 받게 했으며 여성을 문교장관과 문공차관으로 임명하는 사회적 개혁 정치를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제3의 진로이론이라는 리비아식 사회주의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계급철폐론을 외치는 마르크스식 사회주의와는 달리 계급의 차이를 인정하되 그 격차를 줄여나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론이었다. 물론 카다피 일가가 리비아 재정을 삥땅치고 상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중동의 왕가들과 독재자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 또한 이슬람주의식 정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나세르주의의 영향 또한 받았기 때문에 이슬람권이면서도 남녀공학이 실시되었으며, 무상교육뿐만 아니라 학용품, 식비까지 모두 무료인데다가 해외유학비도 국가에서 지원할 정도였다. 이러한 혜택은 저유가와 경제 제재로 재정이 나빠졌던 90년대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당시 리비아는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타 아프리카 국가와는 빈부격차 문제는 덜했고 생활수준은 아프리카에서 1위를 기록했다.

카다피는 농업부문에 있어 자급자족 수준으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노동인구 20%를 차지하던 농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농업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농민들이 자력으로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배분하여 모든 농부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도록 했고, 만약에 한 사림이 자기 개인적 소유를 위하여 농장을 건설하기 원한다면 그렇게 할 자격을 부여했다. 1970년부터 시행된 카다피의 계획으로 관개용지, 목초지 개발, 대수로 공사, 현대적 영농기법 개발을 포함하여 전체 개발예산의 1/6이 농업 개발에 투자됐다. 이러한 생산량은 향상되었고, 1970년 2만 7000톤이었던 밀 생산이 1983년에는 21만 3000톤에 이르렀다. 그 사이 채소 생산은 10.8%가 증가했고, 보리와 과일, 채소, 육류, 계란, 우유 등의 수요 또한 증가했다. 1969년을 시작으로 카다피의 리비아는 산업다각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했으며, 여기서 카다피는 공업부문에서의 노동착취를 종결시키고, 노동자를 생산순환 구조에서 파트너로 간주하는 새로운 협력관계를 확립했다. 1981~85년의 5개년 개발 계획 동안 리비아는 산업 생산의 연간 22.6%의 성장률과 산업생산품 수출의 연간 2.4% 증가 그리고 석유산업 분야 노동자 수 연간 11% 증가를 보여줬다. 이러한 카다피의 사회주의 정책은 전제군주 시대보다 리비아 사람들의 경제적인 몫을 향상시켜 보다 잘 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장래 석유 같은 지하자원이 고갈될 때를 대비하고자 오일머니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실시, 리비아에 농업을 확충하여 농업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했다. 이 공사의 1단계는 한국이 수주했으며, 이 공사를 위해 리비아와 한국과 직항편이 설치될 정도였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로마 시대까지 곡창지대였다. 실제로 북아프리카는 기후가 변해 사막이 되어버려서 그렇지 토질은 여전히 좋은 편이기 때문에 관개만 제대로 된다면 농업이 충분히 가능하다. 즉, 카다피가 마냥 공상적인 계획을 들고 나온 게 아니라는 소리.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에 의하면 당시 리비아의 정치가들은 "대수로 공사를 할 돈이면 리비아 국민들이 1년 내내 먹고 살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카다피는 "대수로 공사만이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대수로 공사를 추진하였다고 한다. 카다피는 최원석 전 회장을 만날 때마다 리비아인을 대규모로 고용해달라는 요구를 하였고, 최 회장은 자국민의 일자리를 신경쓰는 카다피의 모습을 보며 왜 그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지 짐작하였다고 한다. 천만명의 인력과 오백만대 분량의 중장비가 동원된 대공사 끝에 한국의 동아건설은 성공적으로 대수로 공사를 완공하였고 리비아는 한반도 면적의 8배 이상의 땅을 농지로 얻게 되었다. 대수로 공사의 통수식 날 메마른 사막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신기한 광경에 리비아 국민들은 열광하였고 카다피는 이처럼 성공적인 대수로 공사를 세계 8대 불가사의라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반미를 내세우면서 범아랍주의를 내세웠고 아프리카의 통합을 주창했다. 1980년대 초반, 서방국가들이 ANC를 이끌던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며 외면할 때 만델라를 지원하기도 했고. 카다피의 지원은 ANC가 백인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만델라는 항상 이에 대해 카다피에 고마움을 표해왔고, 남아공 대통령이 된 후 서방국가들과 리비아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였다.

우간다에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모스크를 건립했고, 우간다의 여러 기업들에 4천억원 가량을 투자하여 경제활성화에 일조하였다. 돈이 없어 정부청사조차 짓지 못하던 가난한 나라 말리는 카다피의 지원에 힘입어 국영tv 방송국과 정부청사를 지을 수 있었는데, 말리는 카다피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정부청사의 건물이름을 '카다피 행정동'이라 지었다.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목격한 후엔 서방과 화해하는 것만이 리비아가 살 길이라 생각하여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를 선언한다. 그로인해 유엔과 미국이 리비아에 내린 경제제재의 해제를 이끌어내었고, 자국경제를 해외에 개방하여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하였다.

1979년엔 최고지도자의 신분임에도 리비아 우조비행장 건설공사 현장에 나타나 그곳에 텐트를 치고 14일간 머물며 한국기업의 건설현장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카다피는 한밤중에도 불을 켜고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열의와 근면함에 찬사를 보냈고, 공사에 불편함이 없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같은 반미국가였던 김일성과의 관계는 독특한데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다르게 카다피더러 전두환이 파견한 한국 노동자들을 내쫓으라고 요구했지만 카다피는 '한국 노동자 싫으면 너부터 나가면 되잖아.' 라고 냉담하게 반응했다.

한국과 리비아는 이념과 체제는 달랐지만, 카다피의 한국기업 밀어주기 덕분에 한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최필립 당시 리비아 대사의 증언에 의하면 카다피는 한국업체들에게 특혜를 베풀었고, 공사대금도 한 번의 차질 없이 정확히 지불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한국업체들은 편하게 리비아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집권 후반기인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학생 대상 노트북 전면 배급과 실각 이후 중단된 구형 노트북 교체 사업, 인터넷 통신 대부분 무료화 실시는 서방에 파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2000년 8월 필리핀의 이슬람 반군에 납치당한 서양인 인질 여섯명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국제사회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카다피는 반군측에 인질 1명당 1백만달러의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합의하여 인질들을 풀려나게 하였는데, 풀려난 인질들의 모국인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카다피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2004년에는 2차례에 걸쳐 북한에 특사를 파견하여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였으며, 2006년에는 한명숙 총리의 요청을 받고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카다피는 북한에게 "국민들의 고통을 막기 위해선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2010년 6월 한국의 국정원 요원이 리비아의 국가원수 및 가족, 정부요인, 무기 보유 현황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이다 들켜 추방된 사건이 있었다. 이로인해 한국과 리비아는 단교직전까지 갔으나 특사로 파견된 이상득 국회의원과 접견한 후 카다피는 해당사건을 종료시키고 양국간 외교관계를 원상복귀시켰다.

사실 카다피 개인은 독재자이고 지탄받아 마땅한 인물일지 모르나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보았을 때 한국은 카다피 정권 시절 리비아에게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당시 리비아는 한국의 건설업체 해외수주 규모 3위에 해당되는 교역상대국이었다. 카다피는 이상득 특사와의 면담에서 "한국은 리비아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음에도 교과서나 언론에서 나를 왜 그렇게 비하하느냐?"며 서운함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카다피가 실각하고 피살된 후 리비아는 정파 세력들간의 갈등과 내분으로 수많은 극단주의 단체가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지속된 정치·경제 혼란으로 지친 리비아 국민들 사이에선 "카다피 시절이 더 좋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리비아인들의 인터뷰에 의하면 카다피 통치 하에 죽었던 사람보다 카다피가 실각한후 들이닥친 리비아의 혼란기에 죽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한다. 물론 카다피의 통치때도 문제가 많았지만 최소한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문제들은 없었다고 한다. 카다피 통치기인 2010년 리비아의 GDP는 1만1417달러로 어지간한 중진국 수준이었지만 카다피 실각한 후인 2020년에는 3282달러로 3분의 1 이하로 급감했다. 혁명 이전에는 단 한명의 카다피가 있었지만, 리비아 혁명 후엔 수백만명의 카다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며,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쪼개져 내전을 벌이는 리비아의 현실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심지어 리비아 혁명에 첫날부터 참여한 청년조차도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며 죽은 카다피의 열렬한 팬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프라인 뿐만이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해외에 나가있는 리비아인들을 중심으로 카다피에 대한 향수가 불고 있다. 유튜브에 카다피 관련 영상의 반응만 해도 당시의 혁명을 후회한다거나 카다피를 그리워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이런 목소리를 등에 업고 카다피의 둘째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이 정계복귀를 노리고 있다.

한편 카다피 축출 이후 혼란에 빠진 현 리비아 정국에 개탄하고 있는 몇몇의 리비아인들은 그렇다고 예전의 카다피 시절로 역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숙청, 탄압당한 경력이 있었고, 최근 리비아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리비아 국민군(LNA)의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최고 사령관을 지지하기도 한다. 다만 서방과 아랍권의 외교계 일각에서는 하프타르 역시 카다피와 별 반 다를 것 없는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28세에 정권을 장악하여 장기집권을 펼쳤던 카다피와 다르게 하프타르는 이미 70대 고령이라서 리비아의 내전 상황을 종식시키고 리비아의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카다피처럼 종신 독재자가 되지 못 하고, 대신 과도 정부에 가까운 통치를 펼치다 다른 LNA 인사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이외에도 자신은 아랍인이었지만, 흑인 민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넬슨 만델라와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서방에서 테러리스트와 테러조직으로 몰릴때 유일하게 지원한 국가가 리비아였으며, 로디지아의 반정부 무장세력 또한 지원하였다. 또한 아프리카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아랍의 노예무역에 대해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나토의 리비아 공습에 대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극렬히 반대했고,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리비아 혁명 당시 망명을 제안하기도 했고, 현재도 카다피의 비자금을 숨겨주고 있다. 미국 흑인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국 흑인의 이중국적 취득에 큰 도움이 되었고, 흑표당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도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흑인 래퍼의 적지 않은 수가 나토의 리비아 공습을 비난했다. 특히 Run The Jewels의 래퍼 킬러 마이크(Killer Mike)는 대놓고 레이건과 이후 대통령들을 비판하는 노래로 카다피를 지지했다. 카다피에게 직접 밟힌 리비아의 래퍼들은 전혀 아니었지만.

물론 독재정권이긴 했지만 카다피 통치 하의 리비아가 일방적인 독재국가였다고만 이야기하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자세한 부분은 자마히리야 항목 참조. 사회주의자답게 카다피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를 보였고 그 결과 의외로 발전된 선거제도와 지방자치제도가 자리잡았다. 자미히리야(인민의회) 의원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성과 소수민족이었던 만큼 지역간 갈등 완화나 소수자 인권 보호에도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마히리야가 어느정도 공정성을 보였는가 하면 기초 인민 회의에서도 전직 고위 관료가 일반 국민에게 밀려 낙선하는 경우가 허다했을 정도. 이는 미국 등 1세계 국가들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며 서방과 리비아가 관계를 개선하던 당시 조명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직접민주주의의 장단점이 함께 드러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었다. 독재정권이라기엔 꽤나 민주적인 모습을 갖추었지만, 중심축이 무너지자 삽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테러 이야기가 나오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진다. 카다피는 테러는 약자가 강자에게 저항하는 수단이라는 자신의 사상에 기초하여 좌우를 막론하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한 전 세계의 테러리스트를 후원했는데, 좌익이든 우익이든 중립국이든 민족주의 조직이든 이슬람 극단주의든 사상 없는 도적떼든 간에 가리지 않고 무조건 지원하거나 선제공격하여 세계 각지의 분쟁들을 심화시킨 것으로 악명 높았다. 카다피는 테러를 자신의 권력 수단 및 국가적인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적극 이용하였고 캐나다에서부터 영국, 이집트, 이스라엘, 인도네시아를 거쳐 필리핀을 찍고 누벨칼레도니에 이르기까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테러리스트 단체와 무장단체, 반군들을 지원하는 한편 리비아 항공이나 리비아 정보부 등 자국 권력을 이용해 UTA 772편 폭파 사건과 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같은 직접 테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래서 카다피가 사망했을 때 이들 테러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은 카다피의 죽음을 천벌이라며 축하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제 테러 면에서 카다피는 자신의 사상 설파와는 반대로 소위 '제국주의적 행보'를 일으키는 서구 권력층 중심 인물들 대신 불특정 다수 민간인을 더 많이 노리는 비열한 모습을 보였고 정작 자신 역시 석유와 패권에 눈이 멀어 한 때 혁명 동지였던 이집트에 테러를 하고 국경에서 시비를 걸었다가 깨지거나, 리비아 외교관들이 런던 한복판에서 망명자들을 향해 총기난사를 벌인 끝에 애꿎은 영국 경찰 한 명을 죽이거나, 서독 나이트클럽을 폭파시켜 참다 못한 미국에게 리비아 공습을 당하거나, 찰스 테일러와 혁명연합전선을 선동하여 시에라리온 내전과 라이베리아 내전을 부추겼고, 자국보다도 한참 약한 차드를 상대로 리비아-차드 전쟁을 벌였다가 또 된통 깨지는 등 예상만큼 테러로 세계에 큰 설득력을 주진 못했다. 심지어는 자국과 별 관계도 없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사람들을 선동하려다 실패로 돌아가거나 호주에서 외교관들이 뇌물 공세를 하다가 걸려 쫓겨나고 외교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장 베델 보카사 같은 누가 봐도 제 정신이 아닌 자를 지원하기도 했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인종 학살을 지지하여 이슬람 국가들에게 원성을 샀다. 또한 테러 정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적이라고 선포한 동구권이나 프랑스 등과 얼마든지 손을 잡았다가 모른체 하고를 반복하여 불신을 자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카다피는 80년대 내내 온갖 국가들에게 단단히 찍혀 있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서방, 이집트 등 이슬람권과의 관계 개선을 겸해서 테러 노선을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다. 상술한 영국 경찰 살해 사건에 대한 보상이나 로커비 테러 용의자들을 넘겨준 것 역시 이 때 이루어진 것이다. 서방 국가들과 이집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리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다시 복원해주었고, 넬슨 만델라와 코피 아난 등이 서방, 이집트와 리비아의 화해를 도왔다. 물론 겉으로는 그랬다는 거고 속으로는 다시 PKK, FARC, 자유 파푸아 운동과 오마르 알바시르, 무사 다디스 카마라 등을 물밑에서 안 들키게 지원했다.

어찌됐던 카다피의 이런 태도 덕분에 진영논리에 의해 영국, 캐나다, 이스라엘, 프랑스, 인도네시아 등 마음에 안 들었던 친서방 반공진영에 엿을 먹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IRA나 PFLP, ETA, PLO,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 페루의 투팍 아마루 해방운동, ANC의 국가의 창, 남 말루쿠 공화국 망명 정부, 자유 파푸아 운동, 자유 아체 운동, 혁명연합전선, 찰스 테일러의 사병 세력인 NPFL, 필리핀 신인민군, 필리핀 공산당, 빛나는 길, 후티,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프랑스 극좌단체 악시옹 디렉테, 붉은 여단, PKK, FARC,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 전선, 바더 마인호프, 오스트리아의 네오나치와 투아레그 반군 등 세계 각지의 수많은 단체들이 생각지도 못한 지원을 얻었고 FRETILIN이나 자유 카낙 인민해방전선,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투파마로스, 폴리사리오 전선, 흑표당 등 여타 흑인 민권운동 단체들처럼 딱히 테러 단체도 아닌 세력까지 진영논리의 수혜를 받아 얼떨결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자국의 반대파들을 향한 테러 역시 성행했으며 반카다피 인사들은 카다피의 시절을 녹색서에서 따와 녹색 테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카다피의 테러 노선은 이웃 수단 공화국의 오마르 알바시르가 그대로 배워서 써먹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된 2000년대 즈음에 박수칠 때 떠났다면 이 꼴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랬다 해도 카다피가 완전히 무사했으리라고 보장할 순 없는데, 카다피가 지명한 후임자가 카다피보다 못하다면 결국에 카다피에게도 화살이 날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의 단점이 지도자 일인에게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해당 지도자가 아니면 정권교체만으로 국가체제 자체가 바로 흔들려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카다피의 리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탄의 국왕처럼 아예 지도자부터가 "내 권력 내려놓더라도 민주주의 반드시 도입하겠다" 수준으로 소위 '자원봉사'를 하는게 아닌 이상은 독재자에게만 맞춰진 국가체계로 계속 가다가 결국 독재자 유고시 혼란기에 들어서는 과정이 빠질 수가 없다. 상기한 부탄 국왕부터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절대지도자"인, 세계사에 손꼽힐 정도로 극히 예외 중에서도 예외일 뿐이었으니 다른 독재자들은 안봐도 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