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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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tman"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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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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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8월 9일 (5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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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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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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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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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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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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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방씨 (南陽 房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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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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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방극윤, 어머니 최명자,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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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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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천국민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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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북중학교 (졸업) | |
경기고등학교 (87회 / 졸업) |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 / 학사) | |
서울대학교 (경영학 / 명예박사) | |
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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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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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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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교 (불가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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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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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제6회 유재하가요제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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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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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억 달러 (한화 약 3조 8,54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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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이자 기업인. HYBE의 설립자이자 의장이다.
어릴 때는 운동도 싫어하고 5살 때부터 한글을 깨쳐 집에서 하루종일 책만 읽던 소년으로, 부모님이 사회 생활에 문제가 있을까 걱정이 되어 기타를 사줄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 기타에는 관심을 가졌고, 처음엔 그래도 좀 얌전한 클래식 기타로 시작했지만 뭔가 성이 안차 일렉트릭 기타로 바꾼 후, 어쩌다보니 헤비메탈 밴드로 처음 아마추어 무대에 입문했다고 한다. 당시 그룹명은 훗날 보면 좀 오글거리기도 하지만 검치호였다고. 이때가 중학교 시절로 작사, 작곡도 이때부터 점차 한 것으로 보인다.
명문대 나온 부모님 공부 머리를 물려받은게 있어서인지 시험 공부라곤 1시간 남짓 했음에도 다 했다고 나와 또 다른 책을 읽어대는데 성적은 잘 나와 부모가 그런 쪽으론 걱정 안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방시혁 본인도 이 시절의 자신을 ‘친구들이 매우 재수없어 할 정도로 노력 대비 공부 잘하던 천재끼 있던 아이’로 기억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서울대 법대 진학을 희망했으나, 딱히 선망이 있던건 아니었고 그냥 남들이 가라고 하니 뚜렷한 꿈도 없이 따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법대 들어가기에는 점수가 간당간당한 김에 재수는 하기 싫어 법대 대신 일종의 안전빵으로 다른 과를 알아보던 중 미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집에선 반대했지만 떨어지면 재수 안한다는 협박(?) 끝에 결국 서울대 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뭘 공부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들어간 학과였음에도 예술과 탁상공론을 좋아하던 본인 기질에 운좋게 맞아 떨어져 수업이 매우 재미있었고 이전에 하던 음악 공부도 한동안은 내팽개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1994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수상 이후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매진, 원투의 오창훈이 활동했던 그룹인 체크와 김민승이라는 가수에게 곡을 주며 창작 활동을 이어가다 1997년경 박진영에게 스카웃되어 2001년 8월부터 2005년 1월까지 JYP엔터테인먼트 수석 프로듀서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박진영이 작곡가 김형석에게 프로듀싱의 A to Z를 다 배웠다고 밝혔는데 방시혁도 박진영에게 프로듀싱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수상 소감으로 말하기도 했다. 회사를 설립할 당시만 해도 인원이라곤 박진영과 방시혁, 회계 담당 직원 한명이 전부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JYP의 핵심 임원으로 출발한 셈이다. 방시혁이 JYP 2대 주주였던 적도 있었다. 이때 둘이 프로듀싱한 대표적인 그룹이 1세대 국민 아이돌로 불린 god였다. 당시 어찌나 바빴던지 1달만에 음반 1개 작업을 모두 마친 적도 있을 정도였다고.
이때 방시혁은 사회성도 없고 성격도 원체 시크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쟤 원래 저래?"라고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본인 왈 신인 때부터 사람을 가려 사귀는 성격이었다고. 또 철학적인 얘기도 좋아해서 박진영이랑 작업할 당시 둘이 인간은 논리적으로 설득될 수 있는 존재인가? 친구라는건 뭘까? 대중음악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 등 철학 논쟁을 새벽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토론 와중에 서로의 사고를 조금씩 수용하며 대중적 예술은 천박하다 따위의 편협한 사고를 고쳐나갔다고 한다.
음악적으로는 주류 음악계에 활동하면서도 트렌드에서는 살짝 비켜가는 신선한 작곡을 했고, 당시 한국 가요와는 좀 다른 서구권 느낌이 나는 작곡으로 팬들과 평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몇 번의 실험적인 곡들이 히트에 실패한 이후로는 상업적인 히트를 목표로 작곡하는 경향이 짙어져 초기 활동 시절에 비해 비평적 평가는 떨어지고 있다.
2005년 2월 빅히트 엔터테인먼트(현 HYBE)를 설립했다.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JYP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회사에서 작곡 및 프로듀싱을 맡았다. SM엔터테인먼트의 보이그룹 블랙비트의 '날개'를 프로듀싱한 경력도 있다. 이때 필명은 현재도 앨범 크레딧에 사용하는 "hitman" bang이었다. 빅히트로 독립한 이후 JYP엔터테인먼트의 보컬그룹이였던 2AM의 매니지먼트를 2014년까지 전담했다.
2009년에는 엠넷에서 런칭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의 본선에서 메인 작곡가 및 프로듀서를 맡아 첫 생방 미션곡들의 편곡을 담당했다. TOP6 작사미션에서는 작곡 파트너인 Pdogg이 당시 신인 작곡가로서 참여하기도 했으며, 결승전에서는 TOP2인 서인국과 조문근에게 미션곡이자 데뷔곡인 ‘부른다’를 작사, 작곡했다.
2010년에는 MBC에서 시작한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직설적으로 말하는 심사위원' 역을 담당했었다. 사진1, 사진2 사실 방시혁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첫 프로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음악 심사에선 독설도 마다하지 않는 뭔가 K팝스타 당시 박진영 비슷한 이중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얻게 되는데, 예를 들어 "싱어송라이터는 노래뿐만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캐릭터가 된다. 미안하지만 외양에 좀 더 신경을 쓸 생각은 없나?"라든가, 3화에서 스스로를 힙합 프로듀서힙합 전문가라 칭한 점 등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이때만 해도 뭔가 독기 있던 눈빛이 유독 돋보여 더 부각된 점도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도 상업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해서, 상업화된 노선하곤 거리를 두는 참가자에 대해 그 상업음악 하시는 분들보다 많이 못한 실력이라며 진짜 본인의 음악을 알릴거면 실력부터 키우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이후 멘토로서 담당하고 있던 후보들이 그의 프로듀싱을 통해 되레 호불호가 갈리는 심한 변화를 겪어 시청자 평이 나뉘기도 했는데, 요컨대 자신이 담당하는 가수들을 음반 산업에 필요한 상품화 특성을 갖추는 쪽으로 채찍질하고 성형하는 방향성을 가졌었다. 물론 호평하는 쪽에선 다소 직설적이어서 그렇지 날카로운 심사평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지만, 애초에 프로 자체가 발라더를 찾는 프로였다 보니 뭔가 약간 안맞는 옷을 입은 느낌도 있었다. 한편, 멘토들이 끝까지 자기 멘티만 뺀 나머지 참가자들의 심사위원 역할을 했던 프로그램 포맷상 다른 멘토인 이은미랑 파벌, 동맹 논란이 터지기도 했다. 여담으로 멘토스쿨에서 아직 데뷔 전이던 방탄소년단 멤버들의 이름이 나왔다.
2011년에는 동요계에도 진출해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요집'이라는 것을 펴냈다. 이때 조권이 '원숭이'란 노래를 불렀는데, 당시 유치원에서 많이들 들었다고 하는걸 보면 꽤 인기를 끈 모양.
2011년 백지연의 인사이드피플에 출연하여 살아온 인생 등을 인터뷰했다. 그리고 여기서 인정하는 아이돌팀이 있느냐는 질문에 노래, 춤, 외모, 몸매 다 되는 동방신기, 소녀시대 두 팀을 언급했고, 당시 신인이던 미쓰에이도 무대 장악력이나 라이브 안정성이 대단하다며 칭찬했다. 그리고 2세대 걸그룹의 모델을 제시한 원더걸스에 대해서도 창의적인 역량이 뛰어나며 K-POP가 비아시권에서도 뻗어나갈 수 있는 역량을 만들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당시 나는 가수다의 흥행으로 아이돌 가수에 대해 나가수 팬덤을 위시한 일부 대중들의 비하가 이어지는 현상에 대해 평소 지론과 마찬가지로 "한국 아이돌은 외모도 갖추면서 노래와 춤도 모두 잘해야 하는 그야말로 극한직업인데 정작 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비난만 한다."는 식으로 나름의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2011년 4월 27일, 위의 발언의 연장선에서 서울대 ‘언론정보문화 포럼시리즈' 강의에서 오디션 프로그램 등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범람에 대해 "대중들의 귀가 높아지며, 소위 '듣는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그런 기류에 맞춰 아이돌계에서도 노래, 춤, 연주, 작사, 작곡에 능한 뮤지션돌, 즉 완전체 아이돌이 등장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기사) 당시에는 아이돌이 가수보단 외모만 믿고 활동하는 엔터테이너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인지 다 잘하면 아이돌이 아니라 다 잘하는 싱어송라이터 아니냐는 비웃음 섞인 반응도 있었으나, 애초에 방시혁은 발라드로 글로벌 시장은 한계가 있고 K-POP 한류에서는 댄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실제로 훗날 그가 제작한 BTS가 아시아권을 넘어 서구권에서도 활발한 음악 활동을 하는 세계적 아티스트가 된 이후부턴 방시혁의 이런 소신 발언들이 재평가를 받고 있다.
2023년, HYBE 사옥에서 CNN과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어는 리차드 퀘스트(Richard Quest). 여기서 케이팝 시장이 지적받는 문제점과 앞으로 나가야 할 비전 등에 대해 본인의 견해를 얘기하면서, 현재의 K팝은 그 핫함에 비해서는 실제 글로벌 음악 시장에서의 점유율이 생각보다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때문에 여러 레이블과 매니지먼트 컴퍼니를 인수해 인프라를 구축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