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 申重鉉 - 한국 록의 영원한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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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 申重鉉 - 한국 록의 영원한 대부

예명
히키 신
Hicky Shin
출생
1938년 11월 4일 (86세)
경기도 경성부 명륜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본관
평산 신씨
학력
서라벌고등학교 (중퇴)
버클리 음악대학 (명예박사)
가족
아버지 신익균
어머니 이순자
배우자 명정강(1940년 출생 ~ 2018년 3월 23일 사별)
장남 신대철
차남 신윤철
삼남 신석철
종교
무종교
활동
1957년 ~ 현재
직업
기타리스트, 작곡가, 가수
악기
보컬, 기타
장르
록, 사이키델릭 록, 소울, 로큰롤, 블루스
소속
애드 훠, 신중현과 엽전들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작곡가, 가수.


8.15 광복 이후 한국의 대중음악사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이름을 거론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긴 레전드 뮤지션이다. 오늘날엔 '한국 록의 대부'라는 명칭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서 아버지 신익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중현의 생모는 일본인이었는데, 그의 유년기 때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가 재혼한 후 남동생과 여동생이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인 1941년에 집안이 만주국으로 이사했다. 당시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미용사였다. 만주에 살던 어린 시절에는 집안에 대형 축음기가 있었을 정도로 집이 부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수많은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다만 만주에서 그가 살던 시기는 여덟살도 되기 전 삼 사년 정도에 불과했고, 해방 직후에는 집안이 다시 서울로 이사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에는 가난해졌고, 가족이 충청북도 진천에 내려가서 농사일을 하면서 살았다. 이 때 신중현은 농사 일을 도우며 민요도 많이 들었는데 농부들이 밭 매면서 하는 노래들이나, 각설이들이 와서 문밖에서 리듬을 때리는 것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미인'같은 노래에서 한국적인 음악을 구현한 것에도 이 시기의 영향이 있었다고 신중현은 회고한다.

전쟁 중인 1952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심지어 이 시기에는 막내 여동생까지 잃었다. 그 후 신중현은 남동생과 함께 전쟁고아로 자라면서, 창고지기를 비롯한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창고지기를 하면서 고물 라디오로 미군 방송이나 중국 방송을 온종일 듣기도 했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외국의 다양한 음악에 빠지게 된다. 그 후 거의 폐품이 되어 누군가가 내다버린 기타로 연습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전설적인 뮤지션의 시작이었다.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니던 1955년, 학교를 그만둔 뒤, 옷이 없어 교복을 입은 채로 미 8군 공연 팀의 조수로 부대를 출입하게 되면서 음악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미 8군 쪽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은, 중학교 때부터 기타 연습에 몰두하던 그의 실력을 알고, 기타를 배우고자 했던 어느 무용수의 소개에 따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공연 장비를 나르고 심부름하며 출연자들의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일이었지만, 나중엔 무대 한쪽에서 보조로 기타를 연주하기도 하면서 점차 실력을 쌓아나간다. 그러다 1957년 미 8군 연예단에서 드디어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데뷰 무대에서 처음 연주한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All Shook Up'이란 곡이었다. 이때 신중현은 '히키 신'이라는 무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부터 주목받아 미군부대 순회 공연은 물론이고 기지촌의 클럽들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신중현은 사실 이때까지는 밴드의 프런트맨이라기 보다는 기타리스트였다. 실제로 신중현의 전성기 시절의 노래를 들어봐도 훌륭한 보컬리스트는 아니었고, 그래서 당시 기준으로 프런트맨으로 나서기에는 조금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뮤지션들 사이에선 가히 넘사벽급 기타 실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그의 기타 연주가 공연장에 울려 퍼지면 미군들이 "히키 신!"이나 "재키!"를 연호하며 열광의 도가니가 펼쳐졌다고 한다.

1964년에 미8군 연예단을 나와서 록밴드 애드 훠를 결성하고 1집 '비속의 여인' 을 발매하며 데뷔했다. 이 시기는 영, 미에서도 록 밴드 붐이 막 일기 시작한, 즉 록밴드 역사의 초창기였던 시절이다. 신중현은 이 애드 훠 때부터 본격적으로 밴드의 프런트맨이자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국내 첫 창작 록 음악인 '비속의 여인'은 이후 수십년간 신중현이 만들어 발표하게 되는 수많은 불후의 명곡들의 기념비적인 첫 시작이었다.

애드 훠는 당시 한국에 베이스 기타를 도입한 최초의 밴드 중 하나였고, 그래서 당시 쟁쟁한 로큰롤 밴드들(키보이스 등)과 더불어 새로운 록큰롤 밴드 사운드를 재빠르게 도입한 밴드로 역사에 남았다. 키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당시 서구의 최신 음악을 최대한 재현해내는 데에 집중하거나, 엔카식의 멜로디와 록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면, 신중현은 단지 서양 록음악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서양 록음악과 구별되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담은 한국화된 로큰롤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 로큰롤은 너무나 생소한 음악이었다. 비록 엘비스 프레슬리나 진 빈센트 같은 뮤지션들의 몇몇 곡들이 소개되었지만 대부분의 대중들은 트로트를 들었고 외국 음악은 여전히 생소한 음악이었다. 심지어 스탠더드 팝(프랭크 시나트라, 폴 앵카, 빙 크로스비 등)같은 음악도 철저히 외국 것이었기 때문에 확산에 한계가 있었다. 이런 당시 한국 대중음악 토양의 한계로 인해 애드 훠의 데뷰 앨범 "비속의 여인"은 그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고 대중음악의 판도 자체를 바꿀 만큼 큰 임팩트는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소수가 즐기던 클래식 음악만이 고급 음악으로 인정 받을 때였고 대중음악은 '싸구려 유행가'나 '저질 음악' 취급을 받을 때이다. 그래서 당시 한국에서 음악에 관심 있는 리스너들은 클래식, 재즈, 영화음악 정도를 들었고 그외 일반 대중들은 트로트(당시 표현은 가요, 유행가)를 주로 들었기 때문에, 록음악은 (선구적인 소수의 애호가들을 제외하면) 그 어느 쪽에서도 별 관심을 못 받는 소외된 장르였다. 1960년대 동시대의 서양과 일본 등에선 록 음악이 대세로 떠오르던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던 것. 나중엔 한국에서도 드디어 1970년대 초반부터 록음악과 포크음악이 청년층에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서양과 일본 등 주요 국가들에 비하면 수 년이나 늦은 셈이다.

한국에서의 록 밴드 음악 활동은 아직 시기상조임을 깨달은 신중현은 다시 미 8군 연예단으로 돌아가서 악단 기타리스트로 활동을 계속 한다. 그리고 1967년부터는 미 8군 연예단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 외에도 작곡과 음반 제작 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7년에는 이정화, 이듬해인 1968년에는 펄시스터즈의 곡들을 만들어서 취입해줬다. 그러던 중 1968년 미8군 연예단의 월남 위문공연 계획이 잡혔는데 이 무렵 연초에 발표했던 펄시스터즈의 곡들이 예상치 못한 큰 히트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신중현은 월남 위문공연 참가를 취소하고 다시 미 8군 연예단을 나와서, 실력 있는 가수들을 발굴하여 곡을 주고 프로듀싱까지 해서 데뷔를 시키는 음악 제작자로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이후 신중현이 발굴하여 키운 가수와 곡이 하나같이 크게 히트해서 신중현 사단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 이 '신중현 사단'의 유명한 가수로는 펄시스터즈, 이정화, 김추자, 박인수, 장현, 김정미 등이 있고, 유명곡으로는 '거짓말이야', '커피 한 잔', '꽃잎', '봄비', '봄', '미련' 등이 있다.

이 신중현 사단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에 미친 영향과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히트도 히트지만, 각각의 음악적인 시도 자체도 상당히 새로웠다. 대중적인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해외에서 이제 막 태동하던 다양한 장르의 음악적 문법을 적극적으로 국내에 도입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 음악들이 하나같이 상당히 완성도가 높았다. 이 때부터 신중현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본격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확보해 나가게 된다.

일례로 1960년대에 그는 미국의 "솔 사운드 "(소울 음악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소울 스타일의 한국 음악을 만들어냈고, 1960년대 후반 사이키델릭 록음악이 부흥하자,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또 한 번 소화해낸다. 게다가 서양의 신종 장르들을 국내에 빠르게 도입하기만 한 것 뿐 아니라, 서양의 오리지널들과는 구별되는 한국적인 독특한 정서를 담아서 재창조해내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가지만, 사실 펄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도 사이키델릭 록 사운드의 곡이다. 잘 들어보면, 퍼즈톤의 기타와 스트레이트한 비트가 영락없는 사이키델릭이다. 

신중현의 프로듀싱과 작사작곡 능력은 비단 '신중현 사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중현은 자신의 소속 가수 외에도 다양한 가수들에게 곡을 주어 히트를 시켰고, 또 프로듀싱을 하여 데뷔시키기도 했는데, 일례로 '안녕하세요'로 인기를 끌었던 장미화에게도 곡을 주었고,. 김추자 이전에 김상희 음반도 만들었다. 윤수일과 함중아가 몸담은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도 신중현이 제작했다. 이문세의 2집 전체도 신중현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훗날 김완선이 1989년에 불러서 히트한 '리듬 속의 그 춤을'도 신중현의 곡이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기성 작곡자나 가수들이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새로운 음악의 흡수에 다소 인색한 반면, 신중현은 당대에 유행하던 새로운 음악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요 반달을 나름대로의 로큰롤 버전으로 편곡한 버전이다. 드럼의 비트나 기타의 연주가 서프 음악과 흡사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참고로 서프 음악은 선구자격인 딕 데일이나 벤쳐스에 의해 1960년경 미국에서 처음 태동된 음악 스타일이다.

참고로 위 곡은 일부 매체에서 1958년에 발표했다고 소개하고 있는 '히키-申 키타-멜로듸'에 수록되어 발표된 곡이다. 그러나 이 '히키-申 키타-멜로듸' 음반의 수록곡들 중 일부는 1958년 이후에 나온 외국곡들을 커버한 곡들이다. 예를 들면 밀양아리랑의 경우 1962년 발표된 Booker T & the M G 's의 Green Onions를 그대로 커버한 것. 이상의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위의 곡은 적어도 1962년 이후에 발표된 곡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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