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 Yi Sunsin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 Yi Sunsin

 

출생
1545년 4월 28일
(인종 원년, 음력 윤3월 8일)
조선 한성부 건천동 이정 자택
(現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8길 19[지번주소])
사망
1598년 12월 16일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향년 53년 7개월 18일 / 19,590일)
조선 경상도 남해현 군내면 관음포 인근 판옥선 선상
(現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전사(흉부 유탄피격)
시호
충무(忠武)
봉호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본관
덕수(德水)

이(李)

순신(舜臣)

여해(汝諧)

기계(器溪), 덕암(德巖)
재임
기간
전라도 정읍현 현감 겸 태인현 현감
1590년 1월 6일 ~ 1591년 2월 24일
(음력 1589년 12월 1일 ~ 1591년 2월 1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591년 3월 8일 ~ 1597년 4월 12일
(음력 1591년 2월 13일 ~ 1597년 2월 26일)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597년 7월 22일 ~ 1598년 11월 19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1593년 8월 26일 ~ 1597년 3월 14일
(음력 1593년 8월 1일 ~ 1597년 1월 27일)
1597년 9월 3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597년 7월 22일 ~ 1598년 11월 19일)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
(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사당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현충사)

 



16세기 말 조선의 명장이자 구국영웅으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제독이었다. 시호는 충무공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존재만으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구국영웅이다.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대형 동상의 주인공이다.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름을 떨친 호레이쇼 넬슨 같은 명장들은 모두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정부와 외부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반대로 이순신이 정부와 명나라 육군에게 식량, 무기, 종이, 부채, 조총 등 각종 물자와 진상품을 지원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생계까지 직접 돌보면서 힘겹고 외롭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심지어 권율 휘하의 육군이 허락도 없이 이순신이 어렵게 마련한 수군이 먹을 식량을 시도 때도 없이 약탈하고 수군 병력을 마음대로 빼내어 육군으로 편입시키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급자족했으며, 휴전기 당시 수군 기지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군비를 꾸준히 확장하여 최강의 함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7년간 수군을 이끌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끝에 군함을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뤄냈다.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지휘하여 적의 함대를 전멸시켰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 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맞아 화공전술을 펼쳐 200척을 격파하고 100척을 포획하여 불태우고 일본군 수만 명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올 무렵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펼친 인물이었다. 크나큰 공을 세웠기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나라와 의심이 많고 시기질투가 강했던 임금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았고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으며, 피땀 흘려 키워놓은 군대가 원균의 칠천량 해전으로 완전히 궤멸되고, 어머니와 막내아들을 잇따라 잃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인 고난과 역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한 뒤 홀연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춰서 그런지 대한민국에서는 단지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즉 능력도 인격도 최고인데 인생마저 끝없는 고난의 서사, 그럼에도 꺾이지 않은 불굴의 정신과 의지, 그리고 모든 과업을 완수하자 운명처럼 사라진, 영웅 소설의 주인공같은 삶을 실제로 살았기에 추앙받는 것이다.

조선 후기 효종, 숙종, 정조도 이순신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조선 침략 당시 3주 만에 수도 한양,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수군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승리했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나라군 파병 등에 일조하며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해내고 침략군인 일본군의 야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과 자기 사람들을 원리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 및 대우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 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마지막까지 직접 출전해 분투한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평가는 정치적인 성향이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 이순신은 그런 부분에서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말 그대로 민족을 구한 영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것인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 가령 명량 해전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초토화되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했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승려와 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기승전결이 모두 완벽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 이러한 덕에 40여 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1545년(1세) 인종 1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1565년(21세) 명종 20년
이즈음에 방진의 딸인 방수진과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1573년(29세) 선조 6년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1576년(32세) 선조 9년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
12월: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하다.
1579년(35세) 선조 12년
2월: 종8품 한성훈련원 봉사로 재직. 서익의 부당 인사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함.
10월: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가다.
1580년(36세) 선조 13년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7월: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임명되다. 관사 오동나무 사건으로 상관인 성박과 그 후임 이용에게 밉보이다.
1582년(38세) 선조 15년
1월: 군기경차관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5월: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1583년(39세) 선조 16년
7월: 함경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8월: 경원 고을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되다.
10월: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종7품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11월 15일: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1584년(40세) 선조 17년
1월: 부친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1586년(42세) 선조 19년
1월: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다.
2월: 종4품(중령)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1587년(43세) 선조 20년
1월: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8월: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다.
10월: 녹둔도 전투 발발. 이순신이 이일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 그럼에도 이경록과 둘이 전투를 치러 승리하다. 그리고 전투 후 함경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1차 백의종군(보직해임) 처벌이 내려지다.
1588년(44세) 선조 21년
1월: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6월: 아산으로 내려가다.
1589년(45세) 선조 22년
1월: 비변사에서 불차채용을 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다.
2월: 이광의 추천으로 전라도 감사 휘하 조방장에 임명되다.
11월: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12월: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이 되다.
1590년(46세) 선조 23년
7월: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간원의 반대로 개정되다.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간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다.
1591년(47세) 선조 24년
2월 13일: 이억기, 이천, 양응지와 함께 이순신을 남해 요해지로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를 받았고, 이전처럼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정3품(소장)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超授)하다.

1592년(48세) 선조 25년
4월 12일: 거북선(귀선) 건조를 완료하다.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다.
4월 15일: 전쟁 발발 소식을 고지 받다.
5월 4일: 전라 좌수군의 1차 출동.
5월 7일: 옥포와 합포에서 승리로 거두다.
5월 8일: 적진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5월 : 종2품 하계 가선대부로 가자되다.
5월 29일: 전라좌수군의 2차 출동. 사천 앞바다에서 승리로 거두다. 이때 이순신이 총상을 입었다. 거북선을 실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다.
6월 2일: 당포 앞바다에서 승리를 거두다.
6월 5일: 당항포에서 첫번째 승리를 거두다.
6월 7일: 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6월: 정2품 하계 자헌대부로 가자되다.
7월 6일: 전라 좌수군의 3차 출동.
7월 8일: 한산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7월 10일: 안골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7월: 정2품 상계(중장과 대장 사이 실질적으로 도원수 정헌대부로 가자되다.
8월 24일: 전라좌수군의 4차 출동.
8월 29일: 장림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1일: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 부산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1593년(49세) 선조 26년
2월 6일: 전라좌수군의 5차 출동.
2월 10일: 웅포로 진격하다.
3월 6일: 웅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5월 2일: 웅포에서 2번째 승리를 거두다.
7월 14일: 한산도 두을포(한산도 두억리 의항)로 진을 옮기다.
8월 1일: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다.
1594년(50세) 선조 27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6번째 출동.
3월 4일 당항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29일 장문포에서 첫 번째 승리를 거두다.
10월 1일 영등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10월 4일 장문포에서 2번째 승리를 거두다.
1597년(53세) 선조 30년
2월 6일: 선조가 이순신의 파직을 명하다.
2월 10일: 부산포로 출정해 무력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다.
2월 25일: 통제사 직에서 해임되다.
2월 26일: 후임 삼도수군통제사인 원균에게 인계 후 서울로 압송당하다.
3월 4일: 감옥에 갇히다.
4월 1일: 옥중 생활을 마치고 나오다.
4월 2일: 류성룡을 만난 후,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지시 받고 내려가던 도중 아산에 들러 잠시 머물다.
4월 11일: 어머니가 사망하다.
4월 13일: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다.
7월 23일: 이조판서 이항복, 경림군 김명원의 건의로 이순신이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하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수군을 폐하라는 지시를 전하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올리며 수군의 폐지를 반대하다.
8월 18일: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전선 12척을 인계받다.
8월 28일: 어란진에서 왜선 8척과 조우, 교전 끝에 승리를 거두다.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다.
9월 2일: 배설이 도주하다.
9월 16일: 전선 13척과 피난선에 힘입어 명량(鳴梁)입구인 임하도의 좁은 목(우수영 앞바다)을 이용하여 일본군 133척과 맞서 싸워 승리하다.
10월 14일: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듣다.
10월 29일: 고하도로 진을 옮기다.
1598년(54세) 선조 31년
2월 17일: 고금도로 이진하여, 새로운 통제영으로 삼다.
7월 19일: 절이포에서 승리를 거두다.
9월 20일: 명군과 합류해 장도에서 승리를 거두다.
10월 7일: 명군과 합류해 왜교성에서 전투를 진행했으나, 명군의 무리한 전술로 소득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다.처종형인 황세득 사도첨사가 전사함.
11월 19일: 퇴각하는 왜군을 노량에서 요격하던 중 관음포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하다.

1604년 선조 37년
선무공신 1등에 봉해지면서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다.
1643년 인조 21년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1706년 숙종 32년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로 사당 건립을 윤허받다.
1707년 숙종 33년
숙종이 친히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다.
1793년 정조 17년
영의정으로 추증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