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 李蘭影 | Lee Nan-young - 목포를 노래한 트로트 여가수
본명
이옥례 (李玉禮)
출생
1916년 6월 6일
전라남도 목포시
사망
1965년 4월 11일 (향년 48세)
서울특별시 중구
종교
천주교 (세례명 : 마리아)
데뷔
1934년 노래 '불사조'
가족
아버지 이남순(李南順)어머니 박소아(朴小兒)
배우자 김해송, 오빠 이봉룡, 딸 김숙자, 김애자, 조카 이민자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인 가수.
1916년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빠인 이봉룡과 함께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16세 때에 제주도에서 삼천가극단의 순회 공연 중 막간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가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순회극단을 따라다니게 됐다. 삼천가극단이 일본에서 순회 공연을 할 때 작사가인 강사랑이 이난영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오케레코드사의 사장인 이철에게 추천해서, 1932년에 문호월의 곡 <고적>을 처음으로 취입했다.
1934년 <목포의 눈물>을 불러 크게 히트를 쳐서 가요계의 스타로 갑작스럽게 등장했다. 1936년, 21세에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다. <목포는 항구다>, <다방의 푸른 꿈> 등으로 당대 블루스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을 만큼 유명인이 되었다. 1939년에는 '오빠는 풍각쟁이'의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화류춘몽'의 이화자 등과 함께 조선악극단 산하에 '저고리 시스터즈'라는 이름의 그룹을 만들어서 활동했는데, 한국 최초의 걸그룹으로 꼽힌다. 광복 후에도 가수로 활약하였는데, 한국 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된 이후 KPK악단을 직접 운영했다. 이 시절, 후배 가수였던 남인수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을 챙겨주고 아껴주는 남인수의 모습에 반해서 사실혼관계로 지낼 정도였지만,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갑자기 죽게 된다. 일각에서는 자신의 젊었을적 분신, 복제품 수준이라는 이봉룡 선생의 자식과 함께 모아 김시스터즈 라는 3인조 재즈 걸그룹을 만들고 이들을 음악적으로 훈련시키는데 상당한 공을 들여 결국 성공 시킨다.
이후, 이난영은 자식들을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고 1965년 알코올과 아편 중독의 후유증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이난영의 자식들은 미국에서 김시스터즈, 김보이스라는 이름으로 연예활동을 했고 1970년에는 내한공연도 했다.
김시스터즈가 1960년대 미국에 진출하자 애드 설리번 쇼에 동반 출연 하였다. 링크된 영상을 보면 흑인영가를 아리랑 형태로 개사해 부른다.
이난영은 <신춘엽서>, <이천오백만 감격>과 같은 친일 가요를 두 세 곡 정도 불렀다. <이천오백만 감격>을 같이 부른 남인수와 김해송은 전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것에 반해, 이난영은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다. 이유인즉슨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기준인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이 없었기 때문. 확실히, 지속적으로 수많은 친일 가요에 참여한 남인수와는 달리, 이난영의 친일 가요는 그 숫자도 눈에 띄게 적고, 친일 가요에 참여한 적극성을 증명할 증거도 딱히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난영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한국 재즈계에서는 대표적인 원로 재즈 뮤지션으로 손꼽는다.
항구의 불근(붉은) 소매에서는 완벽한 스윙재즈 스캣 창법을 구사했으며 '다방의 푸른 꿈'은 블루 노트의 리듬기반으로 블루스를 노래했다.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사실상 초창기 재즈의 시대였으며 개척자 정도의 위치에 있다. 이 또한 그의 남편이자 작곡가 김해송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1934년 불사조
1934년 봄맞이
1935년 목포의 눈물
1935년 봄 아가씨
1937년 해조곡
1939년 다방의 푸른 꿈
1941년 진달래 시첩
1942년 목포는 항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