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沈守峰|Shim Soo-bong - 여성 트로트 싱어송라이터

심수봉|沈守峰|Shim Soo-bong -  여성 트로트 싱어송라이터

본명
심민경 (沈玟卿)
출생
1955년 8월 28일 (69세)
충청남도 서산시
국적
대한민국
본관
청송 심씨
신체
O형
부모
아버지 심재덕, 어머니 장형복
형제자매
언니, 이부 남동생 1명, 이부 여동생 1명
배우자
김호경
자녀
아들 2명, 딸
학력
인화여자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영학 76 / 학사)
종교
불교 → 개신교(침례회)
직업
가수, 아티스트
소속사
라이트웨이브 엔터테인먼트, 루체 엔터테인먼트
데뷔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
「그때 그 사람」
팬클럽
심비로


대한민국의 가수. 트로트와 발라드, 그 중간의 간극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운 이른바 트롯발라드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활동 중인 원조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 또한 후술되었듯, 정치적 사건에 원치 않게 엮여 활동기를 많이 날린, 한동안 불운했던 가수이기도 하다.

1955년 8월 28일에 충청남도 서산군(現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평양에 살던 심수봉의 모친이 1.4 후퇴 시기쯤 진남포항에서 월남하여 이후 충남에서 부친인 심재덕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부친은 심수봉이 3살 무렵 헤어졌고, 직후 사망하여 심수봉의 기억엔 없다고 한다. 당시에도 심재덕의 나이가 환갑이 다 되었다는거 보면, 26살이던 모친과의 결혼이 일반적인 결혼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외삼촌은 집안 사정 때문인지 심수봉을 고아원에 넘기려고 했다고. 2023년 두시탈출 컬투쇼에서 심수봉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버지 없이 자라고 삼촌은 저를 너무 학대하고, 하여튼 요즘 가만히 전체를 정리하면서 보니까 정말 한 번도 남자에게 사랑받아본 적이 없더라. 우리 남편이 처음으로 그래도 남자로서 (사랑을 줬다). 남편 만난 지 올해가 30년 됐다. 너무나 남자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어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심수봉은 사랑밖엔 난 몰라 속 사랑은 대상이 있기보다는 이상이라고 전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음악을 했던 집안이었고, 아버지, 큰아버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음악과 연이 깊은 음악가 집안이라 민속악의 바흐 집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고 5촌 당숙 심상건(1889~ 1965)은 가야금 명인으로 황병기의 가야금 스승이다. 이런 집안 환경의 영향으로 그도 음악인의 삶을 걷게 된다. 또한 포르테 디 콰트로 소속 손태진의 이모할머니로, 손태진의 할머니가 심수봉의 언니다.


주 전공은 재즈였으며, 당시 최고의 음악가들만 설 수 있다는 미8군 무대에 로큰롤 밴드 "논스톱"의 드러머로 서기도 했었다. 그를 트로트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은 그가 드럼을 치는 모습에 깜놀하기도 했는데 이런 뒷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럼을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 카펜터와 함께 이야기되기도 한다. 이때 김수희와 친분이 생겼다.

심수봉은 당초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으나, 그의 어머니가 이혼 후 이사하게 되자, 어머니를 따라 2학년 때 서울 은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 후, 영등포에 있던 여중에 입학했으나 당시 원인을 알 수 없으며 사람 목소리 같은 미세한 소리에도 뇌에 치명적인 자극을 줄 수 있는 '뇌신경인플레'라는 희귀병에 걸려 입원 치료를 위해 다시 2년 휴학을 했다. 중학교 때의 첫사랑인 가정교사로부터 받은 일본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레코드로 엔카에 대해 알게 되었다. 뒷날 인천 인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만 19세인 1974년에 고교 졸업을 하였다.


심수봉은 같은 해 만 20세의 나이로 대입준비를 시작했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 치고 노래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1960년대에 유명했던 밴드 마스터 엄토미의 부탁으로 1973년 보광동의 한 개인 파티에서 대타로 피아노 반주를 하고 미소라 히바리 노래를 하나 불렀는데 그 연회가 마침 1974년 자신이 실각하기 전 박정희 대통령의 술 시중 돕는 여성들을 섭외하는 역할을 하던,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이 주최했기 때문에 그의 눈에 띄어 박종규가 여는 비밀 사교 파티에 자주 불려갔다가 1975년 대통령 만찬 자리에 불려가기 시작했다. 1975년 처음 봤을 때 박정희는 의외로 늙어보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06년 일본 아사히 신문의 인터뷰에서 밝혀졌는데, 이때 일본 관련 나쁜 말이 있어서 그런지 특정 내용의 사실관계가 뒤바뀌었다며 나중에 보도에 반박했다. 원래는 자신이 미소라 히바리의 곡 슬픈 술(가나시이 사케)을 부르자 박정희는 엔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 왜년을 데리고 왔나면서 화를 냈고, 이에 눈물젖은 두만강과 황성옛터를 부르자 이제야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부분은 심수봉이 쓴 여러 서적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이후 국무총리의 집이 리모델링됐을 때의 연회에서 여러 가수들과 함께 갔을 때 박정희를 만났다.

사실 심수봉은 〈MBC 대학가요제〉로 데뷔하기 이전 프로가수로 먼저 데뷔할 뻔도 했는데, 2023년 두시탈출 컬투쇼에 나온 심수봉이 "제가 도큐호텔이라고 호텔에서 피아노 치고 노래하는 알바를 했다. 그런데 나훈아 선배님이 누구랑 같이 찾아 오셨다.", "어쨌든 저는 서비스로 그 분 노래를 하나 불러드렸는데 그게 인연이 되고 저를 알아봐 주셨다. 저 사람이 가수 안 하면 안 된다면서 레코드 회사 사장님 두 분을 모셔오셨고, 나훈아 선배님이 〈여자이니까〉라는 곡까지 만들어주셨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나훈아의 주선으로 1976년 신세기 레코드와 50만원에 음반 취입 계약을 맺고 녹음에 들어갔지만,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음반 발매가 취소되었고, 심수봉은 같은 해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이후 1978년 〈대학가요제〉로 정식 데뷔한 심수봉에게 나훈아는 "이 바닥이 어떤 곳인줄 알고 왔느냐? 이 험한 곳에서 잘 버텨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라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재수 끝에 1976년 명지대학교의 경영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도중 3학년 때인 1978년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했다. 당시 영상 보기.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음악적 성향이 포크나 록이었던 시절에 심수봉은 자신의 주 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장을 던졌으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 심사위원이 좋은 점수를 안 준 이유는 '너무 프로스러워서'였다. 지금이야 이해하기 힘든 평이지만 당시 〈대학가요제〉의 심사 기준은 대학생의 풋풋함이었기 때문에 심수봉의 세련된 음악과는 상당히 간극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1회 대상 수상자 자격으로 게스트 출연을 했던 여병섭(샌드페블즈의 보컬리스트)이 수상 발표 때에 대기실에서 심수봉 옆에 있었기에 표정을 볼 수 있었는데, 금상까지 자신의 이름이 발표되지 않자, 대상이라고 확신해서 오히려 더 기뻐했다고 한다.[출처]

음악을 들어보면 피아노와 보컬만으로 빅밴드를 압도할 뿐 아니라 악단은 화성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굴욕을 보인다. 여병섭에 따르면, 악단의 연주 실력 때문에 생긴 사고가 아니라 편곡 과정에서 생긴 불상사였다. 악단이 준비한 편곡이 불만이었던 심수봉이 공연 시작 전까지 악단장과 말싸움을 했다고 한다. 결국 서로 접점을 찾지 못하고 각자 알아서 공연에 임하다 보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출처]


그러나 그는 이 대학가요제에서 부른 〈그때 그 사람〉이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그와 겨뤘던 출연자들이 후덜덜한데 임백천, 노사연, 배철수 등이다. 이들은 대상은 못 탔으나 다들 이후에 가수로 데뷔했다. 후일 노사연 등이 밝히기로는 1회에 샌드페블즈가 대상을 덜컥 수상하자 "뭐야, 저 정도면 우리도 할 수 있겠는데?"라고 여겨서 2회 때 실력자들이 대거 참가했던 것이라고 한다. 대상은 부산대학교 중창단 썰물이 수상했고, 노사연이 금상, 배철수가 소속된 한국항공대학교 대표 활주로가 은상을 받았다.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을 통해 인기를 모으던 중, 당시 24세였던 1979년 10월 26일, 모델 신재순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갔다.

민주화된 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술자리에 여가수를 불러 노래를 시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그런 시절이었다. 어쨌든 그 날도 평소대로라면 조용히 지나가 옛 일 정도로 회자되었을 것이지만 공교롭게도 이 날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측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고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10.26 사건을 터트린다.

자세한 것은 10.26 사건 문서에도 있지만 여기에는 심수봉 시점만 따로 설명한다. 수봉은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중정 비서실 의전과장 박선호의 차를 타고 저녁 6시가 조금 지나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다. 이때 신재순을 처음 만났다. 안가 대기실에서 간략한 예절교육과 기밀유지서약을 받고 실내화로 갈아 신은 후 기다리고 있다가 6시 40분 쯤 남효주가 둘을 연회장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박정희 왼쪽에 앉았다. 취기가 오른 박정희는 둘에게 "김(재규) 부장은 술이 아주 세니까 많이 권해주게."라며 농담을 던졌다. 박정희가 "노래나 한 곡 들어볼까" 라고 제의하자 대기실에 있던 기타를 연주하며 그때 그 사람을 불렀고 앙코르를 요청하자 추가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후 다음 노래 부를 사람으로 차지철을 지명했다. 차지철은 "도라지 타령"과 "나그네 설움"을 부르고 신재순을 지명했다. 신재순은 심수봉의 기타 반주로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고 박정희는 간간이 흥얼거리며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김재규는 신재순이 1절 후렴을 막 시작하려는 차에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고성을 지르고 발포하며 끊겼다.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에 한 발언은 "너 건방져!"가 아니라는 설이 존재했다. 반면 심수봉은 꾸준히 당시의 소수설을 밀어서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직접 자문을 맡을 때도 김재규의 대사를 "이 새끼! 너 건방져!"로 정했다. 이 증언 차이는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과 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 저격 전에 박정희가 김영삼을 구속기소해야 한다는 질책에 김재규는 "이미 제명당한 김영삼을 구속시키면 국민들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거라고 인식할 겁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셔야지요."라는 말을 했다는 설도 있으나 심수봉은 자신의 회고록 '사랑밖에 난 몰라'를 출간하면서 김재규는 대국적으로 하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심수봉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나 "버러지 같은 놈" 같은 김재규가 했다고 알려진 발언들에 대해서 김재규가 그런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총 쏘는 데 급했지 여유를 부리면서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것. 둘은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했고,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마지막 탄을 발사하러 들어오는 순간 박정희의 등 뒤에서 나오는 피를 막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김재규가 들어오자 심수봉은 부속실로 피했다. 자세한 건 박정희의 최후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사람은 끝까지 옆에 있었던 신재순과 심수봉이었는데 심수봉은 그 순간을 이렇게 진술했다.


암살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10.26 사건을 강도 높게 조사하면서 심수봉도 조사를 받았다. 합동수사본부는 처음에 대통령의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이 1979년 12월 16일 육본계엄군법회의에 출두할 때 언론에 두 여인의 사진을 뒷모습만 게재하게 했고 손금자(孫錦子)(심수봉)와 정혜선(鄭惠善)(신재순)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는데 실명이 유비통신으로 돌아다녔고 결국 나중에 사실로 밝혀졌다. 심수봉은 현장에 있던 것뿐이었던지라 최종적으론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시대는 그녀를 파란으로 몰고 갔다.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어 한창 활동해야 될 시기에 방송 활동이 금지되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그녀는 이후 잠시 영화계로 진출하여 〈아낌없이 바쳤는데〉라는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도 했지만, 가수로서는 활동할 수 없었다. 이때 쯤 박 대통령의 묘소에 찾아간 적이 있다. 이때 지방 밤업소 사장과 결혼을 하나 인생의 쓴맛을 본다.

1984년이 돼서야 방송 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또 다른 대표곡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히트 치면서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첫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이 아이가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무궁화가 떠올라 만들어 이듬해 발표한 〈무궁화〉가 국민을 선동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방송된 지 단 하룻 만에 금지곡이 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1987년에는 〈사랑밖엔 난 몰라〉가 히트했고 이후 꾸준히 콘서트와 음반 발매를 하면서 현재까지도 가수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족들 중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서운했는데 1992년 박근영(현 박근령)이 도울 일이 없냐면서 사람을 보내면서 오랜 앙금을 풀게 되었다.

1993년 SBS 〈주병진쇼〉에 출연해 암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본인은 "자신이 가수인데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대중들이 자신을 가수보다는 그 이야기 쪽으로만 연관짓는다."라며 힘든 심정을 밝히고, 당시 상황에 관해 비교적 담담하게 진술하였다. 본인이 갔을 때는 이미 정치적 얘기가 한창 진행되고 이제부턴 여흥을 즐길 막바지 타임이라 많은 얘길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박정희가 7시 뉴스를 보다 주한 미 대사와 만난 김영삼 총재를 보고 이미 총재도 아닌 사람을 왜 만나냐고 화를 냈고, 이에 자신은 속으로 '강제로 밀려난거지.'라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일이 터지고 놀란 심수봉은 박정희가 이미 죽은지도 모르고 머리에 확인 사살하려는 김재규에게 그러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고 이후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방으로 피신한 이후부턴 신재순과 문을 걸어잠그고 죽을지 살지 몰라 두려워하며 쥐 죽은듯 있었다고. 이후 체포되어 같이 조사받는 김재규를 보고 인생사 참 허망했다고 한다.


1995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을 만들 때 10.26 사건 당시 상황을 직접 감수했다. 당시 심수봉의 현 남편이 MBC에 재직하고 있어서 가능했다고. 촬영 당시 처음에 금테 안경을 쓰던 박근형(김재규 역)은 조언을 들은 뒤 검은 안경으로 바꿔 썼고, 이 밖에도 문갑의 위치나 높이, 대통령의 의자 모양까지 설명해 제작진이 소품을 다시 준비했다고 한다.

1999년 힐튼호텔에서 데뷔 20주년 콘서트를 열었다.


2004년 연말 자신의 콘서트에 박근혜를 초청한 적이 있는데, 공연기획사에서 멋대로 한 것이다. 이때문에 공연기획사가 콘서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정작 박근혜는 일이 생겨 참석하지 않고 꽃 선물로 대신해서 이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같이 초청된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콘서트에 참석했다.

2006년 5월 20일 박근혜 커터칼 피습 사건이 일어나자 마음 속으로 박근혜에게 이제 정치는 그만하라는 생각을 했는데, 과거의 악몽을 보는 것 같아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하는 게 나아보여서 그렇다고 한다.